<meta charset="utf-8">알리시아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최대한 차분하게 이별을 고했다.

애초에 맹랑하게 약혼 계약을 제안해서 이 관계를 시작한 건 알리시아 자신이었다.

그러니 

 역시  내야 한다고 온라인홀덤.

이번에는 뻔뻔하고 단호하게 계약의 종료를 확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계약은 끝났으니까 이제 우리가 볼 일은 없어요. 서로 관여하지도 만나지도 않는다고 한 거, 기억하죠?”

뻔뻔하고 단호하게는 무슨.

알리시아는 자신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걸 알았다.

냉정하고 무심하게 해야 했다. 그래야 에릭이 믿었을 텐데.

그를 위해서 이러는 것임에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어설픈 자신이 한심해서 알리시아는 손등을 다시 감쌌다.

오히려 무감하게 표정이 변한 쪽은 에릭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에릭은 항상 그런 표정을 지었고 알리시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에릭의 질문에 알리시아는 답을 못했다.

마음이 변했다든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든가 그렇게 말하는 편이 쉽겠지만 그 말은 차마 나오질 않았다.

그건 너무 거짓말이라서 티가 날 것 같아서. 좀 전처럼.

그렇다고 당신이 위험에 빠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에릭이 쉽사리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알리시아는 예전 자신이 납치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이제는 마법사가 자신을 납치했던 일이 에릭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임을 안다.

그들은 세비어의 표적을 되돌려 받기 위해 자신을 노린 것이고 에릭은 그에 휘말려서 죽을 뻔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 그런 일이 생기게 둘 수는 없어.’

그와 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이것 외에도 훨씬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

그런데 그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을 위한 그 한 가지 이유를 넘어서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에릭의 질문에 쉬이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굳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침묵으로 버텼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어려운 침묵이 한참 동안 흘렀다.

이 상황에서도 햇살은 참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심지어 새소리까지 한가롭게 들렸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바람마저 따스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분위기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때 에릭의 커다란 손이 알리시아의 머리에 닿았다.

내리쬐는 햇살이나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따스하게 알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뭐가.

침묵이 흐르는 동안 간신히 가라앉혔던 감정이 알리시아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왈칵 북받쳐 올랐다.


“울지 마.”

뭐가.

그 말 때문에 울고 싶잖아.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

아무렇지 않은 듯한 평상시와 같은 잔잔한 목소리였다.

내일 다시 볼 것처럼 평온하게 에릭은 말했다.


“나는 있을게.”

알리시아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상시대로 걸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노력했다.

못된 말을 내뱉은 주제에 뭘 잘했다고 그의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보여줄 수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후에 알리시아는 코너를 돌고 계단을 올라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내달렸다.

그동안에도 눈물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한참을 뛰었고 흐르는 눈물에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뚝뚝 떨어진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운이 없게도 에릭과 함께 서 있었던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바로 옆이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아마도 이게 에릭을 위한 거라고 알리시아는 믿었다.

어찌 됐든 약혼녀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한때 알았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기사단 선배였던 마크 선배의 죽음도 결국은 극복하고 살아나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먼저 이별을 고한 못된 약혼녀인데 상처는 오히려 덜 받지 않을까.

그냥 결국 그렇게 됐구나 하면서 잠깐의 애도를 표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그건 그거대로 싫지만 차라리 에릭에게는 더 낫지 않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미래의 가정들이 계속 알리시아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서도 알리시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은 끊임없이 뚝뚝 떨어졌다.

***

해가 뜨기 전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문을 열고 대신관이 크게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팔을 빙빙 돌리면서 나왔다.


“끄응. 나이 드니 새벽잠은 없어져서 좋은데 몸이 영 안 따라준단 말이야. 아이고, 깜짝이야.”

투덜대며 새벽 기도를 위해 나온 대신관이 아직은 어두운 복도에서 인영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아니, 알리시아?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대신관이 놀라 물었다.


“어, 대신관님.”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알리시아의 붉게 충혈된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대신관은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래, 알리시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혹시 마력이 잘못됐나 싶었는데 알리시아는 다 쉬어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대신관님. 에릭이 안 가요.”

“뭐? 무슨 소리야?”

“에릭이 안 가요.”

눈물이 또 알리시아의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나한테는 가라고 했으면서 저 사람은 안 가요.”

“이게 대체 무슨.”

대신관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알리시아가 서 있던 창가로 가까이 다가섰다.

창밖에서 내다보이는 후원에 아직도 서 있는 에릭을 보고 나서야 대신관은 상황을 눈치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시아.”

“못되게 굴었는데도 안 가요.”

“그러면 보내지 않으면 되잖니.”